명상 / 선시

 Total 70articles,
 Now page is 1 / 4pages
View Article     
Name   길영태
Homepage   http://ytkil.com
Subject   조주록-남전스님이 고양이를 베다
  남전스님의 회상에서 동서 양당의 스님들이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는데 남전스님이 승당으로 들어와서 고양이를 집어들고 말하였다.

  "말을 한다면 베지 않겠지만, 말하지 못하면 베어버리겠다."

  대중들이 말하였으나 모두 남전스님의 뜻에 계합하지 못하자 곧바로 고양이를 베어 버렸다.

  늦게서야 외출에서 돌아온 스님이 인사를 드리자 남전스님이 앞의 이야기를 거론하고 나서 물었다.

  "그대라면 고양이를 어떻게 살리겠느냐?"

  그러자 스님은 신발 한 짝을 머리에 이고 나가버리니 스님이 말하였다.

  "그대가 만일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고목 스님의해석

  신발 한 짝을 머리에 인 체 한마디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가버리는 조주스님의 모습은 아득히 사물에서 벗어난 몰외인이어서 거짓인 언구와 경계가 그를 얽어매지 못한다.

  남전스님이 학인들에게 추궁했던 것은 사물의 형상에 얽매여 있는 학인들의 분별심이며, 손에들고 있는 것은 학인들의 분별하는 마음이다. 남전스님은 그것을 베어버린 것이다.

  만약 조주스님이 당시 그자리에 있었더라면 남전스님의 뜻에 부합하여 고양이를 살리는 것은 물론 도리어 남전스님의 제2의 방편 흔적을 추궁하였을 것이다.

  언구와 경계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의지하여 생긴 것이고, 이 앎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사물의 진실을 결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앎이 사물의 진실을 항상 가로막기 때문이다. 생사에서 벗어나서 지극한 복덕의 해탈의 경지를 얻는 일은 앎의 속박을 끊고 언구와 경계에 속지 않는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앎이라는 색안경을 벗고 사물을 보아야 실상을 보게 된다.

  나의 해석

  우선 양당에서 고양이를 갖고 다투었다는 것은 서로 자신들의 고양이라고 주장하여 소유권 관련하여 다툼이 생긴 것입니다.

  사실 고양이는 누구의 소유라 할 수 없는 것으로 그저 아마 몇번인가 학인들이 밥이나 먹여주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모든 사물들은 생물을 포함하여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인도 아닌 학인들이 고양이를 갖고 소유권 다툼을 하니 남전스님이 생각해도 정말 화가 날 일이었을 것입니다.

  차제에 그들에게 "말하지 못하면 고양일 베어 버리겠다"라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위의 고목스님의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언구와 경계는 거짓이기 보다는 사물이나 현상을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조주스님의 행위는 절묘한 것이기는 합니다.

  이 행위는 "소유할 수 없는 고양이를 서로 소유권이 있다고 다투는 학인들의 행위나,  그렇다고 살아있는 고양이를 베겠다고 하는 스님의 행위는 내가 발에 신을 신지 않고 머리에 이는 행위 처럼 전혀 가당치 않은 것으로 그야말로 말이 필요없은 어처구니 없는 짓거리 입니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학인들의 잘못은 남전스님이 "말하라!" 라고 했으나 말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생물은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다' 라는 것과 '고양이를 살리기 위하여는 말이 필요없다' 라는 뜻입니다.

  아마 학인들은 여러가지 이유와 설명을 하였을 것입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고양이를 살리는 행위 입니다.

  조주스님은 자신이 격외의 행위로써 남전스님에게 항거함은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는 남전스님에 대한 예의에서도 합당한 행위입니다.

  사실 나라면 성격도 급한 편이라 나중에 어떻게 되는 한마디 말도 없이 다짜꼬짜 떻게 되든 그저 몽둥이로 남전스님 주둥이를 한대 처셔 무조건 고양이를 빼앗아서 자유롭게 풀어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고양이를 살리면 그만이었으며 언구와 경계가 거짓이기 보다는 전혀 이 경우에는 필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위하여는 수행이라는 행위가 필요한 것이지 어떤 특정한 관념(언구와 경계)들이 필요치 않다는 뜻이기도 하였습니다.

  추록 : 조주스님이 고양이가 죽고 나서 나중에 왔으니 '스님이 고양이를 죽인 행위는 신발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 처럼 말도 안되는 멍청한 짓거리 입니다' 라는 뜻의 행위를 보였는데, 만약 당시 그 현장에 있어더라면 그렇게 어렵게 격외의 행위를 보이지 않고 아마 어쩌면 몽둥이는 아니더라도 한대 걷어차서 고양이를 그저 빼앗아 버렸을 것이다.

  언구와 경계를 거짓이라 하는데 결코 이것은 거짓도 참도 아니다. 이는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이유는 거짓인 언구가 있다면 참인 언구가 있다는 결론이기  때문이다. 언구는 절대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경우 언구와 경계는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는 해당없는 것이다.
  
  사실 모든 언구와 경계는 본질에 접근하지 못한다.

  위에 고목스님의 해석중에서 "손에 들고 있는 것은 학인들의 분별심이며.이를 남전스님이 베어버렸다" 라고 했는데 이는 절대로 옳지 못하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무고한 고양이이며, 베어버린 것도 무고한 고양이이다, 어떠한 이론이나 언구로도 이를 미화하여 정당화 할 수 없다.

  위의 해석중에서 앎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정확히는 앎이 아니라 알음알음이다.

  이것은 안다는 것이 아니라, 안다는 것을 언구로 표현한 것이다.앎은 표현되어질 수 없다.




 Prev    般若頌
길영태
  2006/05/23 
 Next    한암 대종사 오도송(2)
길영태
  2005/11/17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lifesay
by.. 산골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