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사람의 수행 / 명상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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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길영태
Homepage   http://ytkil.com
Subject   관념과 이를 제거하는 순수의식
아래 글들은 저와 제가 잘 알고 지내는 도반인 혜광님 그리고 아래 글을 제일 먼저 쓴 "평범한 청년"등 3사람의 수행관련 대화입니다.

두 분의 대화는 주로 관념 쪽으로 치우치고 저는 그 관념을 없애는 방향으로 글을 썼습니다.

  흥미가 있어서 대화에 뛰어 들었는데 결과적으로 괜히 다른 사람들의 대화에 뛰어 들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글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참으로 좋습니다.

  따라서 대화들이 길고 지루해도 읽기를 바랍니다

1)청년의 질문

  저는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평범한 청년입니다. 불교신자라서 솔직히 힌두교나 마하리쉬님 쪽의 사상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누구랑 설전을 벌이다 하도 마하리쉬님의 글을 꼭 읽어보라고 해서 들러봅니다.
자기탐구라는 메뉴를 보니 이런글이 보이더군요.

"...자, 이제 “나”로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그러면 심장 안에서 ‘나-나’라는 형상의 일종의 말없는 광명이 빛날 것입니다.

즉, 한계 있는 것과 많은 생각들이 사라지고, 한계 없고 하나인 순수 의식이 저절로 빛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체험]을 내버리지 않고 고요히 있으면 에고성, 곧 ‘나는 육체다’ 하는 형식의 개인적 느낌이 완전히 소멸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최후의 생각, 즉 ‘나’-형상 또한 장뇌를 태운 불처럼 꺼져버릴 것입니다. 위대한 진인들과 경전들은 이것이야말로 해탈이라고 선언합니다...."

  위빠사나를 하다보면 위와 매우 비슷한 현상들을 체험합니다. 아직까진 어묵동정이 일여하게 되는 수준은 아닙니다. 가끔 말하거나 행동중에도 집중이 잘되면 발현되기도 하고, 좌선시에는 매번 나타납니다.(자연스럽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좌선때는 30~40분정도 삼매에 들기위한 준비기간이라고나 할지, 위빠사나식 사념처를 관합니다. 위의 인용구로 들기 전에는 항상 의식의 문을 3~4개정도 항상 거칩니다. '의식의 다른 영역','의식의 문','의식의 층','단계'식으로 밖에는 표현이 안되네요.(저는 불교경전의 4선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층을 거칠수록 의도적으로 집중할 필요가 없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집중이 유지되고, 명료함이 점점 더 강해지는 느낌이랄까. 잡념,생각의 흐름 더욱 미세해지고 종국엔 끊어집니다.

  각 단계마다 환희나 희열이 올 때가 있는데, 매번 그 강도나 종류가 다릅니다. 성적 오르가슴과 비슷한 것도 있고 그 10배정도의 강도인것도 있고, 신성한 합일감같은 것,또는 호흡이 정지됨,충맥에 에너지 기둥이 뻗침, 잔잔한 평온감, 죽음같은 적정, 신체 마음이 사라져 완전 백지 공이 됨. 등 입니다.(시간이 20분내외가 될정도로 긴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저기 물어보니 도교, 티벳밀교, 요가 체험과 비슷하더군요. 제가 한국인이다 보니 체험도 국제적인가요? ^^

  자기탐구의 인용구와 비슷한 체험도 가끔 합니다. 그냥 "순수의식"이라고 밖에는 표현이 안되더군요. 위와같은 3~4단계의 집중단계후에도 흔들림없이 위빠사나를 하다보면 일체의식의 끊기고 호흠정지와 신체느낌이 사라지며, 심장가운데가 칼날처럼 갈라지면서 뭔가 터져나오기 시작하여 종국엔 온 세상이 순수의식으로 가득차버립니다.(이런 상태는 시간이 매우 짧습니다.) 그런 체험을 한 후로는 좌선을 끝낸후에도 그 임팩트 때문에 잊을 수가없더군요.

  지금부터 질문인데요.

  1. 지금 이런 저의 상태가 수행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요?(힌두나 마하리쉬 가르침의 기준으로볼때를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체험이 상기나 망상, 나쁜 영적 현상, 과도한 집중으로 인한 이상현상, 삼매나 황홀경에 대한 집착같은 부정적 현상이냐는 겁니다.

  참고로 일상생활에서는 욕망, 화냄 등의 에고적 불완전함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원래 종교신자라고 절대 얘기 않하는 사람인데, 지금은 거의 확신에 가까운 종교적 믿음도 생겼습니다.(제딴엔 심각합니다.^^;;)

  2. 저런 체험의 빈도나 시간의 길이가 중요한가요? 즉, 시간적으로 길어져야만 수행의 진보가 있는 건가요? 저상태보다 더 높은 질적 체험은 어떤 것인지요?

  3. 불교적 지혜와 마하리쉬 지혜의 차이점입니다. 불교는 아무리 달콤한 삼매체험이라도 삼법인과 12연기, 팔정도이 지혜가 그 핵심입니다.

  즉 진아, 본래 나, 진리 같은 일체의 상조차도 세우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저의 수행도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고 앞에 말한 체험들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반면 마하리쉬적 진리(가르침?지혜)는 어떤 건가요? 결국엔 아뜨만-브라만 합일 같은 힌두교적 진리를 말하는 거 아닌가요? 그의 사상,일대기를 통해서 보면 신에대한 헌신, 합일의 핵심인듯 한데요. 그로 미루어 볼때 기본적으로 무신론, 무아사상의 불교와 마하리쉬 가르침은 상극의 가르침인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분들은 대승불교의 간화선과 '나는 누구인가'수행을 같은 것으로 보시더군요. '본래자리, 불성, 견성=진아, 본래 나, 진리' 이므로 그 지향점도 같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으나, 언어적 표현과 원래 지향점은 다르다고 생각되는 데요.

즐거운 주말 되십시요.

ps. 게시판 분위기를 잘 몰라서 그런데요. 이런 수행관련 질문에 지침을 주시는 멘토같은 분이 계신건가요? 뭐 누가 답 글을 주시든 저로서는 고맙게 듣겠습니다.





2) 저의 답변 입니만, 주인장 대신 한 글입니다. 이유는 상대의 수행이 흥미를 끌어서 입니다.

무명
[2006/4/2 (11:45)]  이곳을 포함하여 인터넷상에 몇 몇 싸이트는 상당히 수행의 분위기가 좋아서 이곳을 가끔 들어와 봅니다.

  제가 하는 수행은 님의 수행과 비슷합니다.
다만 제 경우는 여하한 황홀경이나 상을 일단 무시합니다.
순수의식이란 아무런 상이 없는 것입니다.
주체는 객체(수행중 인지되는 현상들)가 있음으로 확인 됩니다.
현상이 느껴지는 그 상태로 그저 있음이면 결국 객체도 주체도 없게 됩니다.
순수의식이나 진아의 느낌은 거울에 비친 스스로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순수의식의 체험이 오래되고 항상되게 되면 본인은 확신을 갖게 됩니다.
제 생각으로는 어떤 수행이든 같은 결과라고 봅니다. 불가의 공이 바로 순수의식라고 여겨집니다.  

   3) 이곳 싸이트의 주인장의 역 질문입니다.

  혜광
[2006/4/3 (13:2)]  음메님, 불교의 무아사상은 어떤 것인지요?

  4) 청년의 답입니다

  혜광님께 답올리옵니다.
인도의 종교, 역사적 흐름을 좀 아신다면 이해가 빠르실겁니다.(저도 빠삭^^하게는 모르겠으나 아는대로 정리하자면..) 고타마 싯달타가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의 인도 사상계에도 윤회와 해탈, 아트만 등을 설파하는 종교,철학이 있어왔습니다.

  즉, 자기안의 아트만을 깨달아서 브라만과의 합일로 윤회로 부터 해탈한다는 것이고,  현대의 힌두교와 성인들의 사상도 이것을 계승한 것이지요. 라마나 마하리쉬의 사상과 깨달음도 아루나찰라의 진인으로서 자신의 진아가 신과 하나라는 것을 깨달아 영원을 추구 한다는 점에서 볼때 그 사상적 흐름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불교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무아 사상을 설파한 이후로 인도 사상계와 철저히 다른 길을 걸어왔다고 봅니다. 현대의 인도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불가촉천민, 카스트 제도의 모순이 이러한 윤회와 유아사상(?)에서 발생한다고 보고, 고타마 싯달타를 그러한 인도사상계의 개혁운동가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초기불경에도 매우 많은 부분에서 바라문 사문들과 힌두적 사상에 대해서 논쟁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불교는 역사적,사상적으로 볼때 철저히 아트만, 신, 영혼,주인공,진아 같은 실존적 철학을 완전 부정하는 사상입니다.

  수행적으로도 어떤 상을 새우지 말라는 것이 대승 소의경전인 금강경의 주제입니다. 영원한 순수의식을 발견한다 하드라도 그것조차 부정하는 것이 불교라 할까요? 불교의 공은 나가르쥬나 이후 정립된 대승불교의 사상적 흐름인데요. 나가르쥬나의 중론에서 "연기는 무아이고 무아는 공이다."(정확히는...^^;;)라고 논하므로 공이나 무아나 같습니다. 제가 하는 수행도 불교 위빠사나 수행으로서, 일체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않고, 뭔가 본래자리 라 할 만한 것이 얻어지더라도 지견으로 깨버리는 수행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5) 주인장의 답변

  혜광
[2006/4/3 (21:10)]  만약 누가 깨달아서 無我나 空을 안다면 無我나 空인 줄 아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아는 것이 없다든지(無我) 空하다면 어떻게 알며 무엇을 알겠습니까? 이런 얘기는 어느 특정한 한 시대의 사상적 조류가 아니고 영원한 관심사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장 사랑하고 그 목적 하나로 사고하고 행동하니까요. 흔히 불교는 지혜의 종교라 하는데 지혜는 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모른다는 것(無知)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고요. 안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고 존재한다는 것은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중생이든 부처든 개아든 범아든)  

6) 청년의 답변

  음메~~
[2006/4/4 (1:55)]  저도 처음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었습니다. 안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적 말씀이시네요. 불교와 인도철학의 대비는 서양철학의 인식론, 존재론과 잘 비교되기도 합니다.

  저도 불교의 아비담마를 알기 전에 몇가지 명상기법과 쓰레기같은 명상서적들, 서양철학,동양철학고전을 읽어보기도 했습니다.그런후에 결론은 불교는 "이론적,수행적으로 완벽하다"입니다. 저의 짧은 글로 불교의 "무아"을 판단하기는 불가능하고요 초기불교나 아비담마 관련 책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지혜는 안다"라..지혜, 무지, 고통의 원인 이런것들도 종교마다 다 정의가 다르듯이 불교적 지혜,무지, 고통의 원인도 다른 정의가 있습니다.질문을 던지셨다가 제가 한 답변에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을 하시니 좀 당황되네요^^;; 뭐 악의는 없으셨으리라 생각하겠습니다.

  누가 깨닫고, 누가 공을 무아를 아느냐고 하셨는데요. 그럼 그 누가가 아는 주체이고 그 주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던 거죠? 근데 그 주체가 영원하지 않은 것이고 또는 주체란 것도 아예 없고 아는 행위만 존재한다면? 물론 존재=영원은 아니죠. "안다","나", 이런 단순한 단어조차 깊게 들어가면 참으로 모호한  
  
  음메~~
[2006/4/4 (1:57)]  뜻을 가진 것들인데요. 안다라는 行은 단지 주체의 행동인 것인지, 프로세스의 중간 단계로 존재하는 생멸현상인지를 이해하시면 현대의 인공지능,신경망 공학자들의 논점도 이해하실수 있게 될겁니다. 종교철학같은 것이 아니더라도 현대물리학이나 기술공학 계통을 공부하다가 불교쪽으로 입문하는 경우도 있더군요. 저도 그랬구요. 할 말 많지만..이만 줄입니다.  

7) 주인장의 답변

  혜광
[2006/4/4 (8:51)]  음메님을 골탕 먹이려고 제가 질문을 드린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이해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데카르트는 '안다. 고로 존재한다' 하지 않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지요. 안다는 것과 생각한다는 것을 사람에 따라 같다고 하기도 하고 다르다고 하기도 하지요. 님께서 무엇을 얻거나 느끼더라도 지견으로 깨버린다고 하셨는네, 그 智見이라는 것이 안다는 것이지요. 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는 행위만 존재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요? 만약 깨달음의 목적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라면 과연 누가 깨달으려 하겠습니까? 문제는 개인이 실재한다는 관념이지 존재한다가 문제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혜광
[2006/4/4 (9:15)]  불경을 많이 읽으신 것으로 판단되는데, 화엄경과 열반경을 읽어 보시지요.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신지 2500여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이론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진리는 증명 여부에 상관없이 영원하지 않겠습니까? 처음에 공부를 시작할 때는 알고 싶은 것도 많고 수행하는 분들도 많이 찾아다녔지만 날이 갈수록 단순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어릴 때야 단물, 쓴물, 신물 등 무엇이 첨가된 것을 좋아하지만 나중에는 단순한 맹물이 가장 맛 있다는 것을 알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깨달음이나 진리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관심이 갖다보니 그 '나'에게 이롭고져 깨달음이나 진리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8) 청년의 글

  음메~~
[2006/4/4 (14:25)]  네 저도 동의합니다.

  남방불교의 선사들은 그래서 부처님법을 37조도품으로 설명할 수있고 더 작게는 계정혜 더 줄이면 마음챙김sati 이다 라고 까지 하시죠.(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으니 정확치 않더라도 이해해주십시요.) 한국,중국의 선지식들이 즉심즉불, 이 마음이 곧 부처다. 본래 마음자리를 찾아라 등으로 마음을 강조하시는 것은 진아, 성불같은 존재론적인 실재를 상정하고 그것을 깨달으라는 뜻이 아니고, 연기법적으로 이순간에도 계속 변화무쌍하게 흐르는 내안의 마음의 작용을 잘 챙겨라(sati)의 뜻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직 공부도 부족하고 수행력도 적어 이런 想마저 변할지는 모르겠으나...'아는 행위만 존재한다'는 뜻은 그렇게 이해해 주십시요. 저같은 범부가 어찌 '실재'를 논하겠습니까 마하르쉬님이든 부처님이든 그분들이 말하는 '실재','무아'같은 것을 제 평생에 체험하고 이해할수 있을지나 모르겠습니다. 저의 처음의 질문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자만심이나 마하리쉬 사상을 공격하기 위한 삿된 의도가 아닙니다. '이런 저런 체험을 했고 이렇게 공부하고 있는데, 마하리쉬님 공부를 하시는 분들은 이런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냐?'  

  음메~~
[2006/4/4 (15:32)]  이런 대체적인 줄거리의 질문이었고, 또한 제가 이해하는 불교, 김가가 이해하는 불교,최가가 이해하는 불교가 있겠죠. 제가 이해하는 불교는 혜광님과 다른점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사상계 역사계 운운하는 내용들은 암베드카르의 책이나 각묵스님의 책에서 읽고 저도 동의하는 부분을 제식대로 정리해 생각나는 데로 쓴 것이므로, 그렇게 얼토당토 않은 이론은 아닙니다. '아는 행위만 존재한다'는 문장도 지금 읽어보니 좀 거시기 하네요. 회사에서 몰래 쓰는 글이라~~이해해 주십시요. '아는 행위(의도,行,상카라)만이 연기법의 적용을 받으며 생멸한다.'라고 정정하겠습니다.

  아는 행위는 인식, 생각, 식, 견, 지 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불교의 윤회와 힌두교의 윤회의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힌두교의 윤회는 아트만이 윤회한다 라고 하지만, 불교는 識 이 업력에 의해서 전도변화 한다 라고 합니다.

  이글을 쓰는 "음메~~"라는 자도 찰라 찰라 변하는 약간의 일관성을 가진 색수상행식의 연속이 아닐까요? 굳이 수행적으로만 아닌 사유로도 가능한 지혜가 아닌지...  

9) 주인장의 글

  혜광
[2006/4/5 (8:54)]  이런 대화들은 자칫 아상만 키우는 소모적인 논쟁이 되기 쉬운데 진지하게 말씀을 해 주셔서 그러지 않아 고맙습니다.

  저는 불교를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마하르쉬님의 가르침과 불교 사이에서 어떤 모순이나 갈등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두 가르침을 공부할수록 서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 홈페이지의 '나누고 싶은 가르침'이라는 코너에 있는 28번 글 '수냐타'을 읽어 보시고, 열반경에서 설해진 열반4덕인 常樂我淨을 알아보시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10) 청년의글
  
  음메~~
[2006/4/5 (20:55)]  치심으로 가득한 자의 빈글을 진지하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가지 부탁이 있다면..마하리쉬님의 (일대기나 전기보다는)구체적인 수행방법과 사상체계를 깊이있게 다룬 책 한두권 정도를 추천해주셨으면 합니다.관련 서적이 너무 다양하여 어떤것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대담"같은 책은 괜찮을까요?  

   11) 주인장의 글
혜광
[2006/4/6 (20:26)]  진아여여, 라마나 마하르쉬와 진아지의 길, 인도명상기행을 추천해 드립니다. 이 홈페이지에 진아여여라는 코너가 있기는 합니다만. 책보다는 읽기가 불편하고 책의 내용 일부가 없습니다. 그리고 법보시판이라 시중에서 구할 수 없습니다. 인도명상기행은 오래 전에 나와 절판이 되어 그 또한 시중에서 구할 수 없습니다.

  제가 진아여여와 인도명상기행을 몇 권 가지고 있어 주소를 알려주시면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에 주소를 남기기 곤란하시면 yirshi@orgio.net으로 메일 주십시오. 라마나 마하르쉬와 진아지의 길 등 그밖의 바가반 관련 책들은 알라딘(www.aladdin.co.kr)에서 왼쪽의 [종교/역학]/아루나찰라 총서(탐구사)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이 홈페이지의 오른쪽 탐구사의 책을 누르시고 맨 밑으로 가면 알라딘에 접속하실 수 있습니다. 음메님의 행운을 빕니다.

  12) 저의 글

얼마전 발령이 있어서 이번에는 강원도 고성으로 근무처를 옮겼습니다.

앞으로 2-3번 정도 더 발령을 받아서 근무지를 옮기면 아마 정년이 다 되어서 퇴직을 하겠지요,

저도 수행인이기에 한마디 하지요,

혜광님 말씀처럼 스스로 무아 또는 진아임을 알게 되는데 있어서 이를 아는 자는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논리라면 분명히 아는자는 주체이고 그 대상은 객체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진아라고 알게 되는 경우 그 진아는 진아가 아니고 그것을 아는 주체가 진아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내가 바로 그것이다 라고 말하면 그것임을 아는 그 주체가 그것일지언정 그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진아를 증득한 자는 한 사람도 없게 되거나 진아를 증득 하였더라도 스스로 진아임을 알고 있으면 진아를 증득치 못한 수행인이라는 결론이 됩니다.

주체는 반드시 객체가 있음으로 주체가 스스로를 확인 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나는 어떻구나 하고 알았다면 그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은 객체일 까요 아니면 주체일 까요,, 여기에 대하여는 뭐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객체라면 주체가 없어지더라도 그대로 있어야 하나 그렇지 못하고 그것이 주체라면 주체가 둘이 있게 됩니다.

오랜 세월 수행의 결과 스스로가 진아 임을 아는 것은 스스로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무엇임을 아는 것처럼 그 알기 시작함이 결국은 스스로 비춤이 없이도 스스로 암(느낌) 그 자체로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비유컨데 각자라면 자신을 비추는 그 거울은 내면에 녹아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13) 주인장의 글

   혜광
[2006/4/4 (9:37)]  무명님, 안녕하십니까? 고성군으로 가셨군요. 어떤 이들은 강원도의 두메산골로만 다니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수행하는 사람들에겐 그것이 행운이 아니겠습니까? 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합니다.

  제 말씀의 요지는 개인으로 존재하든 진아로 존재하든 불성으로 존재하든 존재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를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진아의 세 가지 측면은 중 하나가 의식인데 의식은 반드시 自의식이라고 하신 바가반의 가르침이 제가 드리는 말씀입니다.

  '나'를 꼭 개인이라고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무엇도 소멸되거나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은 진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 또한 그렇지 않겠습니까?  

14) 저의 글

태초이전의 그 순수의식을 회복한 자만이 사실 깨달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그 의식을 결코 自 의식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유는 제가 경험하는 그 순수의식은 결코 쉽게 체험되고 증득되는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전혀 인간이 말하는 관념으로서의 "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개별적이고 개체적인 나라는 개인의 특성이 없는 비 이원성이기 때문입니다.

그 의식은 산 사람만의 의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자만의 의식도 아니며 생물만의 의식도 아니며 그렇다고 무생물만의 의식이 아닙니다.

인간이 쉽게 감지되는 그러한 활동적인 의식만도 아니며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소멸 될래야 될 수 없는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완전히 소멸시킬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나는 무엇(진아 또는 공)이다. 또는 나는 무엇이 된다"등의 생각이 털 끝 만큼이라도 있다면 자기소멸이라는 정제과정이 불가능하므로 절대로 그 의식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라도,,꿈속이라도 自라는 생각도 글자도 마음도 버려야 체득됩니다.

자기 소멸에 있어서 한순간이라도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완전히 비어버리는 수행이 있어야 한순간이라도 그것에 도달합니다.

나를 꼭 개인이라고 말 할 필요가 없다는 그 말씀은 맞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나"라는 것을 생각할 때 어떠한 경우라도 인간의 사고로 생성된 관념으로서의 "나"라고 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섞이지 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순수의식은 위에 말했듯이 규정 지을수 없는 것이기에 自라고 할 수도 그렇다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며, 그것은 自라는 관념 생성이전의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自라는 미련을 완전히 버린다면 바로 그것을 증득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완전히 버리는 것에는 실제적인 죽음 보다 더한 고비가 있습니다.

그 고비는 현상에 작용하던 의식이 생명(현상으로서의 존속)을 포기하고 내면화하는 순간을 말하는 것인데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3년 정도 수행 시마다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수행인들은 여기서 좌절하고,, 아무리 수행을 많이 해도 이것을 돌파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수행의 방편은 달라도 이 고비는 거의 동일합니다.

그것은 이 고비를 넘어야 의식이 내면화하기 때문입니다.

이 고비는 自라고 의식을 완전히 벌릴 때 돌파가 가능합니다.

순수의식은 自라든지 또는 그것이 아니라든지 하는 어떤 색깔이나 그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가장 쉬운 방편은 어느정도 수행이 되면 무조건 자신의 소멸을 지향하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라진다면 모든 관념의 색깔들이 일시에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원래 수행의 방편 이 다르기에 저는 이곳에서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만, 혜광님은 도반으로써 그 수행의 순수함에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반드시 기필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수행을 완성하리라 믿습니다.

  15) 청년의 글

  음메~~
[2006/4/4 (19:47)]  무명님은 마하리쉬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하시는 분인가요? 아니면, 다른 수행법을 하시나요?  
저같은 경우는 감각, 느낌, 인식, 생각, 상, 마음챙김 자체에도 계속 마음챙김(저의 마음챙김은 방하착,대상에 대한 집착버리기,대상을 있는그대로 맨느낌으로 보기 도 포함합니다.)을 하다보면 깊은 삼매 또 깊은 삼매 식으로 의식의 층을 계속 돌파하면서 '명경지수''순수의식(저나름대로의 순수입니다.마하리쉬님이나 무명님이 언급하신 순수의식과는 아예 다른 것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 어느 순간 더이상 이선을 넘고 싶지 않다, 마치 이선을 넘어서면 이것(자아,진아,생명?)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순간이 올때가 있었습니다. (대략 작년 가을정도의 일이었네요..) 지복, 평온감, 공도 아닌 완전 진공의...모르겠습니다. 수행이란 것이 워낙 개인적인 세계라...그냥 읽으시는 분들이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재미있게 읽으셨기를...  

   16) 저의 글

  무명
[2006/4/4 (22:1)]  인간이 수행을 통하여 도달하는 그것은 전부 동일합니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아무런 색깔이 없기 때문입니다.(너와나 현상과 본질 삼매 의식의층 등 어떤 구별(간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행인들이 잘못 이해하여 실수하는 경우로는 무조건 깊이 들어가는 것만 능사로 아는 경우입니다.

  순수의식은 있음 그 자체로 어떤 깊이로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또한 예전의 수행서나 불경을 많이 보았습니다만, (육묘법문, 천태지관, 사념처등)수행시에는 분명히 어떤 깊이로 깊어지는 의식의 단계가 보이는 것 같아 무한정 깊어 진다고 여겨집니다만, 어느 한계에 달하면 결코 깊어진 것이 아니라 본연의 모습 그대로 드러났음을 알게 됩니다.

  또한 나는 초견성 이후 아엠댓 등 마하리쉬님의 서적을 많이 읽었었고, 그 덕에 나 자신의 수행의 방향이 제대로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수행법이나 또는 수행의 돌파구를 찿기 위하여 여러가지 수행을 합니다.

  나 또한 여러가지 수행을 하였으며 주로 묵조선과 화두선 쿤탈리니 그리고 티벳 밀교의 수행등을 했습니다.

  지금은 그저 수행중이든 일상중이든 수면중이  

  무명
[2006/4/4 (22:8)]  든 몽중이든 순수의식의 상태로 있음을 즐기는 정도 입니다.

  수행중에 나타나는 죽음의 공포는 안이비설신의등에 작용하는 즉 외부를 지향하는 의식은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본능 즉 방어력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내면의 집중등으로 이 의식이 점점 외부지향으로 부터 떨어져나와서 내면화 되면서 그 한계를 넘어가게 되는 싯점에서 "이제는 외부에 대한 방어력을 포기 하여야 한다, 즉 생명에 대한 방어를 포기하여야 한다" 라는 정도가 되면서 지독한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비유컨테 이때의 공포는 벌거벗겨져서 아무런 방어력이 없으면서 악귀나찰이 우글거리는 곳에 버려져서 그 악귀나찰이 자신을 파 먹어도 그저 모른체하고 모든 의식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는 그러한 상황정도 입니다.
이 때에는 "육신은 물론 영혼이 소멸되어도 좋다. 내 육신을 파 먹어버려도 좋다" 라는 각오로 그저 무조건 외부지향을 포기하고 내면으로 의식을 집중하여야 합니다.

  수행이 반복되면서 계속하여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나 점차 그 공포는 의식이 자유자재로 외부에서 내면으로 향하면서  

  무명
[2006/4/4 (22:11)]  공포가 사라지게 됩니다.

공포가 사라질 때쯤이면 순수의식이 무엇인지 증득하게 됩니다.

  어떻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그 인연이 언젠가는 좋은 결과를 갖고오리라 여깁니다
이곳은 혜광님이 계신 곳이니 더 글을 남기면 실례가 되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역시 같은 도반으로 열심히 수행하시는 분이니 너그럽게 이해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음메~~
[2006/4/4 (23:18)]  예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항상 행복하시기를...  

17) 혜광님과 저와의 마지막 대화 혜광님의 글 중간 중간에 제 의견을 넣는 형식으로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이 글은 평소 그 분께 꼭 해드리고 싶었던 내용으로 이 글을 쓰고 나서 참으로 미안한 마음을 가졌었습니다.()안의 글이 제 답글입니다.

:무명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우리들은 어떤 경우든 '나'로 존재하는데도 수행하는 분들은 '나'라고 얘기하기를 꺼려하는데,

(**수행의 속성상 사람은 항상 나라는 관념속에서 살아 왔기 때문에 우선 이것을 소멸시켜야 본질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꺼려하는 것은 오직 수행을 위한 것 입니다. 일단 소기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면, 나라는 존재에 대한 관념은 그 깨달음에 걸 맞게 저절로 변형되어 있기 때문에 꺼릴 필요가 없습니다.**)
:
:  그것은 아마 우리 민족의 피 속에 녹아있다고 할 수 있는 불교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하며, 개인적으로 그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봅니다. 분리된 개아가 실재한다는 생각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아서 나라는 것을 경계하고 경계해야 하겠지만 제가 쓰는 의미는 아래 인용하는 바가반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개아가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지만(개아가 마야의 산물이라 해도) 어떻게 보면 그 개아마저도 유일무이하고 미묘하고도 미묘하며 아주 위대한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하지요,,, 절대로 당연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세상살이 무슨 재미로 살아가겠습니까. 더우기 개아를 이루는 성품이나 개성, 인격, 적성등이 있기에 수행도 가능한 것입니다.

고통이 바로 즐거움이니 이 또한 개아가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더욱이 깨닫게 되면 개아가 바로 진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개아 성주괴공 하는 현상이라도 진아에서 비롯되어 단 순간이라도 진아로 부터 떨어져 나온바 없기에 이 개아를 통하여 진아를 증득합니다.

만약 개아가 헛된 것이며 허망한 것으로 실재가 아니라면 그 허상을 통하여 실재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다만 진아에 다다르지 못한 수행인은 소기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어떠한 경우라도 개아를 소멸 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소멸 될래야 될 수 없는 그 무엇이 남게 되는데 이것을 "정제과정" 이라고 저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 무엇이란 바로 모든 관념이 배제된 개아이며 그것이 바로 진아입니다.

개아가 수행에 의하여 그 본래의 모습을 나타낸다면 그것이 바로 진아 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진아를 증득한 수행인은 진실로 성주괴공하는 육체를 갖고 현상으로써의 개아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말은 실제로 체험하여야 하는 것이기는 합니다.***)

(**어떻든 진아를 증득한 수행인이라면 개아로써의 삶을 즐기며 살 수 있는 것인데 이는 그가 개아라는 관념으로 부터 자유로워지되 그 관념을 떠나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 즉 나와 나라는 느낌과 나라는 영혼 그리고 나의 감정, 나의 에너지등 을 포함한 모든 현상들은 그것이 성주괴공하여 헛되나 하나 이 헛되다하는 것은 현상에만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고 수행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가르침이나 실재는 전혀 헛되며 허상이라 할 수 없습니다.

도데체 본질로부터 떨어져서 본질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현상이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본질이 있기에 우주라는 현상이 생긴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현상은 본질로 부터 전혀 떨어져 나온 적이 없기에 파도가 하나 하나 분리되어 보여도 항상 바다였듯이 바로 현상이 본질입니다.

따라서 개아가 바로 본질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든 제자분들의 가르침은 그 본래의 스승에 비하여 조금씩 차이가 나기도 하는 것은 진아를 증득한 것을 같아도 이를 표현하는 것 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은 표현 자체가 바로 관념이기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어째서 그 스승에 그 제자의 말들이 모순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도 합니다.

  그러나 전혀 모순되는 것은 없습니다.

  어차피 모든 관념은 관념을 부정하지도 그리고 긍정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혜광님이 진아를 증득하면 혜광님만의 말을 하게 됩니다.

  그 때 혜광님이 개아는 헛것이며 쓸모 없는 허상이다 라고 말했다면 그 것을 틀렸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개아도 개아 나름이고 이를 받아들이는 상대도 상대 나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각자의 가르침은 한쪽으로는 맞고 한쪽으로는 맞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관념의 속성입니다.**)
:
:************************************************************************************************참고 : 아래는 혜광님이 인용한 "바가반"님의 가르침입니다.
:
:문: 세계는 그 자신을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것은 존재합니다.
:
:답: 의식은 항상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입니다. 만약 그대가 무엇을 의식한다면, 그대는 본질적으로
:
:그대 자신을 의식합니다. 비非자기의식적 존재(Unself- consious existence)라는 것은 용어상의
:
:모순(contradiction in terms)입니다. 그것은 전혀 존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속성적 존재
:
:(attributed existence-의식의 대상으로만 성립하는 존재)이며, 반면에 진정한 존재, 즉 상常은 하나의
:
:속성이 아니라 본체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실재(vastu)인 것입니다. 따라서 실재는 상常-식識(sat-chit),
:
:즉 존재-의식으로 알려져 있으며, 결코 다른 한 가지를 배재하고 단순히 한 가지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도 않고,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그대가 어떻게 그러한
:
:세계가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
:  그리고 세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속적인 변화이며, 끊임없고 무한정한 유전流轉(flux)
:
:입니다. 의존적이고, 비非자기의식적이며, 항상 변해 가는 세계가 실재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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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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